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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리뷰 — 평생 역사를 쓰던 조정래가 마지막 장편에서 사랑을 택한 이유

ekyu 2026. 10. 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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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꽃》 리뷰 — 평생 역사를 쓰던 조정래가 마지막 장편에서 사랑을 택한 이유

조정래가 사랑 이야기를 썼다고 했을 때 조금 의외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건 사랑보다는 역사이고, 이념이고, 노동이고, 돈이고, 그 안에서 버텨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작가가 긴 장편소설 작업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에서 사랑을 정면에 놓았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정말 사랑 이야기 하나를 써보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서리꽃》을 읽다 보면 역시 조정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쓰면서도 사랑만 쓰지 않는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두 사람 사이에 돈이 들어오고, 가족이 들어오고, 아버지의 권력이 들어오고, 사회적 지위가 들어온다.

결국 이 작품에서도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와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서리꽃》은 늦게 찾아온 조정래의 연애소설이라기보다는, 평생 사회를 바라보던 작가가 마지막에 사랑까지 사회 안에 놓고 바라본 소설에 더 가까웠다.


시작은 의외로 아주 순수하다

이재이와 윤소인은 대학 시절 만난다.

재이는 시를 쓰고 소인은 그림을 그린다.

둘의 시작에는 돈도 없고 집안도 없고 계산도 없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그 시를 그림으로 옮기고,

서로가 만든 것을 좋아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요즘 소설에서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만큼 고전적인 사랑이다.

말 그대로 사람 하나가 좋아지는 과정이다.

조건을 검색하지도 않고 앞으로의 경제적인 가능성을 따져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두 사람 사이로 현실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랑을 갈라놓는 건 마음이 아니라 돈이었다

재이의 아버지는 사업가다.

아들의 삶을 아들이 결정하도록 두는 사람이 아니다.

미국 유학 역시 재이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아버지가 정해놓은 삶의 방향에 가깝다.

재이는 떠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이별 이야기다.

그런데 5년 뒤 다시 만났을 때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

재이가 기억하고 있던 소인과 눈앞의 소인은 같은 사람인데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소인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빚은 가족을 짓눌렀고,

소인의 몸과 마음도 망가져 있다.

여기서부터 《서리꽃》이 단순한 재회 로맨스에서 벗어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여전히 좋아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상태인가가 문제가 된다.

사랑에는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런데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고 빚을 갚아야 하고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조정래는 그 현실을 피하지 않는다.


돈은 사랑을 살 수 없지만 사랑을 부술 수는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던 부분이다.

흔히 사랑과 돈을 반대쪽에 놓는다.

진짜 사랑이라면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리꽃》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빚 때문에 삶 전체가 무너지고,

경제적인 실패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를 끌어내린다.

소인의 삶이 무너진 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싶어도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현실이 너무 많다.

이 지점에서 조정래가 평생 써왔던 이야기가 다시 보인다.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사회 구조가 한 사람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는 것.

《서리꽃》에서는 그 구조의 가장 직접적인 이름이 돈이다.


그래서 재이의 사랑도 결국 선택이 된다

재이는 소인을 다시 만난 뒤 그녀를 돕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돈을 대신 갚아준다는 사실이 아니다.

재이가 어떤 세계를 선택하느냐에 있다.

한쪽에는 아버지가 있다.

돈과 권력, 사업, 성공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재이가 그 길에 들어가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다.

반대쪽에는 소인이 있다.

빚과 병, 불확실한 미래가 있다.

재이는 후자를 선택한다.

이걸 그냥 순애보라고만 보면 조금 아쉽다.

재이가 선택하는 것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동시에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믿는 것은 돈의 힘이다.

재이가 믿으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재이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결국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 모순이 현실적이다.

자본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조차 돈이 필요하다.


조정래가 사랑을 쓰면서도 자본주의를 놓지 않은 이유

작가가 직접 《서리꽃》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조정래가 바라보는 현실에서는 사랑조차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누가 더 좋은 사람인가만으로 관계가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돈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결정할 수 있는지,

그 힘의 차이가 관계 안에 들어온다.

특히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그렇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현실에서 너무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마음도 있을 수 있다.

자식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부모가 정해버리는 순간, 사랑과 통제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사랑은 남녀 사이에만 있지 않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도 있고,

그 사랑이 권력이 되는 순간도 있다.


가부장적인 가족과 돈은 생각보다 잘 붙어 있다

책에서 아버지가 가진 힘은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돈이 있다.

사업이 있고,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고,

그래서 가족 구성원들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부장제가 단순히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한다”는 오래된 문화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권력이 함께 있을 때 훨씬 강해진다.

돈을 가진 사람이 선택권도 가진다.

누가 유학을 갈지,

누구와 관계를 이어갈지,

어떤 삶을 살지까지 결정하려 한다.

《서리꽃》의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자유도 경제적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는 데까지 간다.

이건 꽤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재이의 사랑은 때때로 너무 완벽해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재이가 소인을 위해 하는 선택들은 굉장히 크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까지 걸 수 있다는 사랑은 분명 아름답다.

다만 읽다 보면 가끔

“정말 사람이 여기까지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 연애소설의 감각으로 보면 상당히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어떤 독자에게는 조금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도 몇 장면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이 조정래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 같았다.

현실적인 연애를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에서도 끝내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 가능한가

를 시험하는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재이가 아주 현실적인 인물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조정래가 확인하고 싶은 가치의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왜 하필 지금 사랑을 썼을까

조정래는 1970년에 등단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굵직한 문제를 소설로 써왔다.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

이념,

산업화,

자본주의.

그런 작가가 장편소설 작업의 마지막에서 사랑을 꺼냈다는 것이 나는 꽤 의미 있게 느껴졌다.

평생 거대한 역사를 쓰다 보면 결국 이런 질문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 역사를 견디며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사회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경제 체제가 바뀌어도 사람이 계속하는 일이 있다.

밥을 먹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가족을 만들고,

헤어지고,

다시 누군가를 기다린다.

조정래는 이번 작품을 내면서 사랑을 인간이 삶을 이어가게 하는 희망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알고 책을 보면 왜 마지막에 사랑을 골랐는지가 조금 이해된다.


거대한 역사를 쓰던 사람이 결국 한 사람에게 도착한다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개인의 삶은 커다란 역사 속에 있다.

그런데 《서리꽃》에서는 시선이 훨씬 가까워졌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작아졌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 속에도 사회가 전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인의 가족이 무너지는 데는 자본주의가 있고,

재이와 아버지 사이에는 가부장적인 권력이 있고,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는 과정에는 돈과 계급이 있다.

조정래는 사회를 떠나서 사랑을 쓴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 안에 다시 사회를 집어넣었다.

이게 이 작품에서 가장 조정래다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시와 그림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도 좋았다

둘의 관계가 돈과 가족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는 시와 그림이 있다.

재이가 시를 쓰고,

소인이 그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린다.

특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변용한 그림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진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이 처음 시작되는 곳에는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들이 있다.

시 한 편.

그림 한 장.

누군가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돈의 힘이 커지면서 이 시작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돈 때문에 삶은 부서지는데,

처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린 이유는 돈과 아무 관계가 없다.

책이 계속 붙들고 있는 대조다.


‘서리꽃’이라는 제목도 그래서 어울린다

서리꽃은 이상하다.

추운 날 생긴다.

따뜻한 봄날 피어나는 꽃과는 다르다.

살기 좋은 환경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위 때문에 만들어진다.

소설 속 사랑도 비슷하게 보였다.

두 사람이 가장 좋은 조건에서 만났다면 훨씬 쉽게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이 진짜 시험받는 건 모든 조건이 나빠지고 난 뒤다.

빚이 있고,

병이 있고,

가족의 반대가 있고,

미래도 불확실하다.

그런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다.

그래서 서리꽃이라는 제목이 지나치게 낭만적인 비유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름답지만 차갑다.

그리고 오래 유지될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더 지켜보고 싶어진다.


사랑이 사람을 정말 구할 수 있을까

이런 소설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이 질문을 하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사랑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병은 치료해야 하고,

빚은 돈으로 갚아야 하고,

먹고살아야 한다.

소설도 그걸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빚을 마법처럼 없애주지는 못해도,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을 수는 있다.

병을 없애지는 못해도,

치료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

과거를 되돌리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될 수는 있다.

나는 《서리꽃》의 사랑을 그 정도로 받아들였다.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한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게 옆에서 붙잡는 것.


젊은 작가가 쓴 사랑 이야기와는 확실히 다르다

읽으면서 계속 느꼈다.

요즘의 연애소설과는 결이 꽤 다르다.

관계의 미묘한 감정을 세밀하게 해부하기보다는 사랑의 가치 자체를 믿으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조금 오래된 감각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반대로 그 확신 때문에 마음에 들어오는 부분도 있다.

요즘은 사랑조차 효율과 조건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잘 맞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손해 보지 않는 사랑.

그런 시대에 80대 작가가

그래도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 것이라고 밀어붙이는 모습이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조금 고집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조정래답기도 하다.


마지막 장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작가는 이번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장편소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앞으로는 단편과 산문 같은 다른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50년 넘게 장편을 써온 사람이 장편소설이라는 형식과 사실상 작별하면서 선택한 이야기가 사랑이라는 점은 마음에 남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큰 수술 이후 쓴 작품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더욱 그렇다.

역사를 오래 쓴 작가가 인생의 끝에 가까워져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돈도,

권력도,

사업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조정래가 내놓은 답은 꽤 단순하다.

사랑이다.

너무 오래된 답이다.

그래서 오히려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조정래는 마지막에 사회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랑을 쓰면서 조정래가 평생 붙잡아온 사회 문제에서 조금 벗어난 줄 알았다.

다 읽고 나니 반대였다.

사랑을 통해 다시 똑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사람을 짓누르는 돈,

가족 안의 권력,

아버지가 자식의 삶을 결정하는 방식,

사업 실패 하나가 가족 전체를 무너뜨리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도 어떻게든 자기 삶을 선택하려는 사람.

다만 이전에는 역사가 중심에 있고 사랑이 그 안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사랑이 중심에 있고 역사가 바깥을 둘러싸고 있다.

방향만 바뀐 셈이다.

그래서 《서리꽃》이 조정래의 장편 작업 마지막에 놓인 것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평생 세상이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썼던 작가가 마지막에는 반대쪽을 묻는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이 소설의 사랑은 거기에 대한 답에 가까울 것이다.

완벽하게 세련된 연애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랑이 지나치게 순수하게 그려진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고, 인물들의 선택이 요즘 감각에서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점까지 포함해서 싫지 않았다.

이건 젊은 사람이 사랑의 복잡함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과 사회를 바라본 사람이 마지막쯤 와서도

“그래도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게 있지 않겠느냐.”

하고 다시 한번 믿어보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서리꽃》을 다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그 고집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계산적으로 변해도,

돈이 사람 사이까지 들어와도,

사랑도 하나의 조건처럼 취급되는 시대가 와도,

끝내 계산되지 않는 것이 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조금 낡아 보일 수도 있지만,

가끔은 그런 이야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한 줄 감상

평생 세상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써온 작가가 마지막 장편에서는, 그래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다시 살게 할 수 있다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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